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유난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느 날 모임 회원들과 어울려 뜻밖의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도예가 김기철 선생님 댁 가마였어요.
가을이었습니다. 선생님 댁 텃밭에서 수확한 팥으로 팥고물을 묻힌 인절미를 먹으러 간 길이었지요.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햇곡으로 빚은 인절미가 아니라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에 놓인 장식장, 그 위에 백자 항아리, 거기 꽂힌 빨갛게 익은 찔레 열매였습니다. 한 폭의 그림이었어요. 도자기는 그날 그런 식으로 내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 김기철 도자기 ⓒ ‘작은 그릇 안에 담긴 우주’ 김기철
토기, 도기, 석기, 도자기
도자기는 넓은 의미로, 흙으로 빚어 구운 그릇이나 장식물을 가리킵니다. 크게 토기와 자기로 나눌 수 있고, 소성온도(도자기 가마 온도)에 따라 토기(clay ware), 도기(earthen ware), 석기(stone ware) 그리고 자기(porcelain)의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 토기
토기는 손톱으로도 금이 그어지고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이 스며서 밖으로 번져 나옵니다. 보통 섭씨 600~700도 정도의 낮은 온도로 굽는데 선사시대 토기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 토기 ⓒ <옹기> (정양모, 외)
■ 도기
도기는 토기보다는 단단하지만, 쇠칼 같은 것으로 자국을 낼 수 있어요. 역시 물이 스며들어요. 우리가 토분으로 부르는 붉은색 화분이나 떡시루 등이 도기입니다. 불의 온도 800~1,000도에서 구워냅니다. 찻잔, 실내 건축에 사용하는 타일, 화장실 도기 등도 여기에 해당되지요.
▲ 화장실 위생도기, 웨지우드 퀸즈웨어 도기
■ 석기
석기는 도기보다 더 단단한 그릇으로 때리면 쇠붙이 소리가 납니다. 물이 그릇에 스며들지는 않으나 아직 자기로는 되지 못한 단계입니다. 석기 소성을 위한 불의 온도는 1,200도 정도로 건물 외벽에 사용하는 건축용 타일, 전기 시설용 도기, 실험 용기 등이 석기에 해당하지요.
▲ 레드윙의 석기 주전자, 외벽 타일 석기
■ 자기
자기는 불의 온도가 1,300도 전후의 고온에서 구워서 흙이 더욱 유리질화되어 단단하지요. 그릇을 들고 빛에 비춰보면 비칠 정도로 투명합니다. 가볍고 단단하며 투명할수록 좋은 그릇으로 칩니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백자병, 철화포도문항아리 ⓒ 민족문화대백과
청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고려’하면 저절로 완성되는 단어가 고려청자입니다. 고려가 청자를 갖게 된 힘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차’입니다. 마시는 ‘차’. 사람들은 찻사발을 만들기 위해서 청자 개발에 힘을 쏟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에서 차밭을 가꾸게 하고 차를 마시게 했지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도자기를 갖고 싶어 한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도기에 차를 마셨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도기는 미세한 구멍 사이로 찻물이 스며듭니다. 온도도 변하고 맛도 깔끔하지 않았지요. 제대로 마시려면 찻물이 스며들지 않는 자기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차를 사발에 마셨을까요? 찻잔에 마시지 않고. 찻잎을 덖어 찻주전자에 넣어 우려 마시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시대까지는 가루차를 마셨어요. 가루차를 마시려면 손이 많이 갑니다. 찻잎을 따서 시루에 찐 다음 절구에 찧어서 떡처럼 만들었어요. 이걸 ‘떡차’라고 하지요. 떡차를 말려서 보관하다가 마실 때 꺼내서 불에 구웠어요. 그다음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어 찻사발에 넣고 물을 부어서 마셨어요. 찻사발을 구하지 못한 백성은 떡차를 솥에 끓여서 마셨고요. 가루차를 마시려면 찻잔보다는 사발에 넣고 가루가 물에 잘 섞이도록 저어야 했을 겁니다.
▲ 청자상감운학문대접 ⓒ 국립중앙박물관
청자는 권력의 상징
청자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상징이었어요. 정복 시대에 청동으로 만든 칼과 장식들이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정복 시대와 다른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어요. 고려시대에는 전시과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이 마음을 수양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청동기를 대신할 것으로 그들은 청자를 선택했습니다. 청자는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에 적합했고, 관료들에게는 학문을 사랑하며 우월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합당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낮은 수준의 도자기에 만족해야 했지요. 청자라고는 하지만 토기를 굽던 흙 위에 녹색 유약을 입혀 구운 정도였습니다. 녹청자입니다. 녹청자는 기술이 부족해 유약은 흘러내렸고, 색깔은 어둡고 칙칙했습니다.
▲ 녹청자대접 ⓒ 국립중앙박물관
피난지 절에서 만난 청자
도자기 역사를 보면 씁쓸한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나라가 위란에 처할 때 한 발자국씩 도자기가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청자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993년 전쟁은 서희의 담판으로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1010년 거란의 재차 침입 때는 사정이 달라 왕도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왕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지요. 나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피난을 급히 오느라 제대로 무엇 하나 챙겨오지 못한 관리들에게 걱정이 있었어요. 임금님께 나무 그릇에 음식을 담아 수라상을 올릴 수 없었던 거예요. 어디선가 좋은 그릇을 징발이라도 해와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좋은 그릇은 어디에 가야 있을까요? 당시는 귀족의 집이나 절이었습니다. 절에 비취색 청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보다 발달된 도자기 문명을 갖고 있던 원나라 청자도 갈색이었습니다. 청색 유약을 바르지만 굽는 과정에서 산소를 만나면 갈색으로 변했거든요. 그런데 지방의 절에 청자가 있다니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강진에서 만든 청자가 나주의 절에 있었습니다. 개경의 귀족은 왜 몰랐을까요? 청자는 부자들의 주문으로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청자를 본 순간 그들은 위란에 처한 나라를 하늘이 돕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원하는 맑은 비취색 도자기를 만난 것을 천운이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개경으로 돌아와 천리장성을 쌓는 한편 청자 개발에도 온 힘을 쏟았습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가 하늘의 손자라는 증표였던 것처럼, 푸른 빛 청자가 왕실을 위기에서 구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후 고려청자 순청자라고 하면 ‘강진 청자’가 대표하게 되었지요. 순청자란 문양이나 장식이 없는 청자를 말합니다. 동물·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 순청자 청자사자뚜껑향로 ⓒ 국립중앙박물관
청자는 왜 강진에서 만들었을까
강진에서 청자를 만든 것은 푸른색 때문입니다. 강진에 무엇이 있어서 그럴까요. 흙에 든 성분 때문입니다. 0.1 그램의 미소량과 1도의 온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마술을 부리는 성분이 철입니다. 철은 쇳덩어리를 생각하지만, 우리 피가 붉은 것도 철분 때문인 것처럼 신비한 물질입니다.
흙 속에는 철분이 들어 있습니다. 청자의 성패는 철분의 양 조절에 달렸는데, 청자의 가장 좋은 빛깔은 철분 함량 약 3%일 때입니다. 그보다 적으면 연한 풀빛에 가깝고 그보다 많으면 어두운 녹색이 됩니다. 8%를 넘으면 갈색이 됩니다. 청자의 빛이 균일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청자를 구하려는 귀족들의 수요에 따라 도공들은 어떻게든 비췻빛 자기를 얻기 위해 좋은 흙을 찾아다니다 강진에서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강진 흙이 3% 철분을 함유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강진 청자는 비쌌습니다. 청자를 쓰고 싶은 사람은 많았지만, 수요를 댈 수 없었지요. 이는 녹청자 생산에 영향을 주어 강진 청자보다 더 많은 녹청자를 구워냈습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가라앉은 배에서 건져 올린 청자에 녹청자가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녹청자는 강진 옆 해남에서 주로 생산했습니다.
한편 해남 녹청자도 거듭 발달을 합니다. 바닷가에 흔한 조개껍데기를 곱게 빻아 유약에 넣었습니다. 조개껍질 성분 덕분에 높은 온도에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녹청자가 강진 청자의 인기를 앞지르는 일이 생깁니다. 값이 싼데다 조개껍질 유약 덕분에 더 반짝이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약은 규석, 장석, 석회석 이 3가지가 성분을 결정합니다. 비록 질 좋은 흙은 아니었으나 값싸면서도 고급스러운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 유약 덕분입니다.
▲ (좌) 청자철회초화문병 (우) 철화당초문매병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아이러니
고려는 불교를 숭상한 나라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연등회,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적극 장려하고 부처의 은덕으로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지혜의 상징이고 사자는 진리의 상징입니다. 연꽃과 사자 모양의 도자기를 만들어서 차를 마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특히 청자 찻잔에 마심으로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지요.
고려청자 가운데 으뜸은 상감청자입니다. 상감청자는 문벌귀족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때 제작되었습니다. 문벌귀족이란 특정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귀족이 여러 대에 걸쳐 중앙 고위 관직을 차지하면서 형성된 세력을 말합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당한 일을 벌였고, 젊은 문벌귀족이 수염이 허연 무신을 조롱하는 무례한 행동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정중부 일행이 일으킨 무신의 난을 기억하시는지요? 1170년 문신에 업신여김을 받아오던 것에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이 일으킨 난이지요. 부정부패를 일삼는 문신과 무기력한 의종을 내치고 무신정권 시대를 엽니다. 그러나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대를 이어 가며 무신정권은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상감청자는 의종 때 만들기 시작해서 이들 무신에 의해 꽃이 핍니다.
▲ (좌) 상감청자모란넝쿨문표형주전자 (우) 청자상감모란국화무늬참외모양병 ⓒ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송나라에서 유학한 문신들은 중국풍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벽란도에는 중국 물품을 실어 나르는 중국 상인들로 넘쳐났습니다. 그중에는 문신들이 앞다퉈 구매하는 중국 도자기가 주요 품목이었습니다.
무신정권은 이러한 문신에 반하여, 혹은 그들이 좋아하는 송나라 도자기에 대항하기 위해 우수한 상감청자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문화를 모른다고 무시 받던 무신들이 문신에게 보란 듯이 풀어낸 분노가 상감청자로 꽃을 피운 것일까요? 오늘날 고려의 최고 도자기로 칭송받는 상감청자는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상감기법은 고려가 청자에 사용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사용한 것은 고려가 처음입니다. 상감기법이란 흙이 굳어지기 전에 표면을 조각칼로 파내고, 파낸 틈에 백토라고 불리는 흰색 흙을 넣어 무늬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도자기는 불에 구워지는 동안 수축하거나 팽창합니다. 상감기법은 열에 의해 변형되는 것까지 계산해서 제작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상감기법으로 그린 그림이 선명하게 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인’입니다. 하지만 인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색이 불투명해져 상감기법의 그림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적정량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자유로움의 향연, 분청사기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극심하게 받았습니다. 원나라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데 남해안은 왜구의 출몰로 백성들의 삶이 나날이 힘들어지고 있었지요. 한편 나라에서는 원나라에 보낼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더욱 많은 청자를 만들도록 강요했습니다.
청자 가마는 남해안과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길이 좋지 않아 바닷길로 도자기를 개경까지 실어 나르려면 바다 가까운 곳이 유리했기 때문이지요. 도공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몰이 잦아지던 왜구들로 인해 더 이상 해안가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없게 됩니다. 도공은 가마를 버리고 숲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도자소에서 도망친 도공들이었으나 배운 게 도자기 굽는 일이어서 어디든 닿는 곳에서 도자기를 구웠습니다. 고려청자를 만들던 흙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도자기 굽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분청사기입니다. 새로운 도자기의 출현은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바로 신진사대부, 즉 새롭게 등장한 관리들이라는 뜻입니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처럼 청자를 만드는 흙을 쓰고 상감기법에 쓰인 ‘백토’로 무늬를 낸 뒤 유약을 발라 구웠습니다. 분청사기란, ‘백토로 분장한 청자’라는 뜻입니다. 질이 떨어지는 흙과 유약으로 부실한 가마에서 구웠으나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무늬를 만들어 흙이 지닌 단점을 보완했습니다. 도공들은 흙이나 유약을 개발하기보다 그림과 무늬에 더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분청사기는 현대미술품 같은 멋을 내는 도자기가 되었지요.
▲ (좌) 분청사기철화어문항아리 (우) 분청사기파도어문병 ⓒ 국립중앙박물관
도자기의 새로운 기법은 새로운 정신이 표현된 것입니다. 분청사기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국보』 백자·분청사기(정양모편,예경산업사,1984)
『분청사기연구』(강경숙,일지사,1986)
『역사를 담은 도자기』(고진숙,한겨레,2008)
『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1982)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0+시민기자단 김영문 기자 (aidiow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