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가도 좋은 곳 

북촌은 어느 때 가도 좋은 곳이지만 가을과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북촌은 쉽게 말하면 조선의 정전인 경복궁과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 사이로, 이름만으로도 뜨르르한 세도가들이 살았던 삼청동과 가회동을 가운데 두고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주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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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골목길

 

서울 공예박물관 마당 가을볕

북촌 나들이는 3호선 안국역 1번출구에서 시작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면서 바로 풍문여고가 있던 자리에 ‘서울공예박물관’이 보인다. 공예박물관 마당이 된 운동장은 절반은 잔디를 심고 절반은 백자갈을 깔았다. 초록과 백색의 선명한 대비가 공예박물관 하얀 벽과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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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7월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은 공예품뿐만 아니라 공예를 둘러싼 지식, 기록, 사람, 환경 등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공간으로, 전통부터 현대까지 약 2만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가을볕을 넣어도 / 무겁지 않은/가을볕 솜틀법 / 뒤숭숭한 꿈자리들과

이곳저곳 뭉친 늦잠들이 / 보송보송 새로 부풀고 있다”

-김영인 「가을볕을 솜틀하다」 중에서

볕이 좋은 가을날은 가을볕을 만끽할 일이다. 솜처럼 부푼 햇볕을 받으며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지도를 손에 든 외국인 관광객이 여럿 눈에 띈다. 북촌을 산책할 때는 정독도서관 앞에 비치된 북촌 안내도를 들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북촌 명소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공예박물관 건너편은 그동안 높은 담장으로 가려져 있던 송현동 기무사 자리에 조성한 꽃밭에 가을꽃이 만개했다. 꽃구경하는 이들로 거리가 붐볐다. 조용한 길을 찾아 가을볕이 눈이 부신 공예박물관 마당을 가로질러 뒷길로 들어섰다. 윤보선길. 이승만 대통령 뒤를 이어 4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가 근처에 있다. 윤보선 생가에는 그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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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끝물 가지가 가을볕을 아껴 자라고 있다. 

 

담장 모퉁이 한 뼘 땅에 가지가 자라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을빛이 흔하고 흔한데,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가지에 머문 골목길 가을빛이 귀하다.

 

안국동 윤보선 생가를 오른쪽으로 두고 창덕궁 쪽으로 방향을 틀면 재동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에 배정받는 어린이가 있을까? 기왕 초등학교를 다닌다면 이런 학교를 다니면 좋겠다, 두런거리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떠올랐다며 동행하는 이가 재동초등학교는 박완서 선생님이 현저동에서 산 넘어 다닌 학교라고 아는 양을 한다. 아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인왕산 아래 매동초등학교를 다니셨다.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에 개교해서 현재 230여 명의 어린이가 재학 중이다.

 

가회동 백인제가옥

재동초등학교를 오른쪽으로 두고 북촌로 길을 가다 보면 가회동 주민센터가 나온다. 그 맞은 편에는 손병희 선생 집터가 있고, 손병희 선생 집터를 지나 북촌로7길에는 가회동 백인제 가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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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회동 백인제 가옥의 솟을대문. 조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형식을 그대로 따라 지은 높다란 대문간채. 

 

가회동 백인제 가옥은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조가옥으로 1913년 6월에 건축되었다.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이 압록강 부근에서 자라는 흑송을 가져와 지은 집이다. 높은 대지 위에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고 행랑 마당에 들어서면 앞쪽으로 상당히 높은 기둥으로 일부 2층으로 된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부엌, 안방과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넌방이 모두 남향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가을볕을 쬐며 툇마루에 앉아 마당 끝에 붉은 달리아와 사루비아를 보며 한옥과 잘 어울리는 가을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군의 여학생들이 솟을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서 화르르 웃음꽃을 피운다. 나른한 고요와 마당 가득한 가을볕을 여학생들에게 양보하고 뒤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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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제 가옥 별채. 가옥 개방 초기에는 열렸던 별채 출입이 지금은 금지되었다. 초기에도 여럿이 한꺼번에 올라갈 경우 마루 손상이 우려된다며 인원을 제한했었다.

 

백인제 가옥은 오늘날까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주택으로 윤보선 가옥과 더불어 대형 가옥 두 채 중 하나이다. 윤보선 가옥은 현재 후손이 거주 중이라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일반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백인제 가옥 하나다. 백인제 가옥은 건축 당시 가회동 일대의 한옥 12채를 합친 널따란 대지 700여 평에 고급 목재로 지었다. 한옥에 일본식 가옥 형태를 겸한 근대가옥으로 당시 최고급 가옥이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은행가였던 한상룡이 지었다. 두 번째 주인은 조선일보 주주이자 기자였던 최선익이었다. 세 번째 주인으로 백병원 설립자이기도 한 백인제는 국내 최초로 신장 적출 수술에 성공한 외과의사이다. 1944년 가회동 저택을 매입해, 현재 ‘백인제 가옥’이라는 명칭을 따온 당사자이기도 하다.

 

느리게 걸어야 더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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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품가게 화분에서 자라는 꽈리와 담장 위에서 행인을 내려다보는 북촌 고양이.  

 

백인제 가옥을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골목길을 걸었다. 북촌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어느 골목을 걸어도 좋다. 여름내 푸르게 줄기를 벋었을 꽈리가 남은 가을볕에 빨강을 더하며 익어가고 있었다. 느리게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나라라도 잃은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팔을 늘어뜨리며 심드렁하게 걸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담장 위에 고양이가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 산책은 오후가 제격이다. 누군가 살았던, 지금도 살고 있는 골목길을 돌아설 때 한 줌 불어오는 바람에 그 골목에 살다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인생이 실려 올 것만 같다. 그 바람에 커피콩을 볶는 현재를 사는 사람의 냄새도 실려 오고. 시간을 헐렁하게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산책이며, 그중에서도 도심 산책이 으뜸이다. 

 

춘곡 고희동 집

창덕궁 담장길 창우극장 뒤편에는 오래된 칼국숫집이 있다. ‘비원손칼국수’집이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칼국수 집으로 가는 길에 춘곡 고희동 미술관을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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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동 미술관 대문.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국 1세대 대표 서양화가의 집. 미술관의 출입문으로는 수수하기 짝이 없는 대문.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이다. 그러나 정작 미술관에 들어서면 그의 그림은 한국화풍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서양화를 배워 <부채를 든 자화상>을 졸업작품으로 그렸다. 더운 여름날 적삼 차림으로 부채를 부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당시로서 파격이라 할 만한 차림이었다. 귀국 후 휘문학교, 보성학교, 중동학교 등에서 후학에게 서양화를 가르쳤다. 그러나 1927년 완전히 서양화를 접고 산수화와 사군자로 방향을 튼다. 짧은 기간 서양화를 그렸고 대부분 산수와 사군자풍의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 서양화가 적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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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안마당. 미술관 구조가 독특하다. 일본식 주택의 느낌이 나는 긴 복도가 좌우 공간을 연결하고, 유리문 너머에 마당이 보인다. 화실과 연결된 사랑채는 안채에서 두 계단 내려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고희동 미술관은 1918년 지었다. 고희동이 직접 지은 집으로 ㄱ자 모양이었다가, 나중에 사랑채를 증축해서 ㄷ자 모양 집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희동 집은 원래 지은 모양에서 많이 변형된 형태라고 한다. 1950년대 말 3대가 살던 이 집을 떠나 제기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여러 사람들이 거쳐 가는 동안 덧붙이고 고쳐서 원형을 거의 잃은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1995년 안채와 사랑채만이라도 옛 형태를 복원하려고 했으나 미흡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희동 미술관은 창덕궁 담장 아래 있어 해가 일찍 진다. 미술관을 나왔을 때는 궁궐 안 나무꼭대기에 해가 손수건만큼 걸려 있었다.

 

 

50+시민기자단 김영문 기자 (aidiow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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