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생각하기 좋은 계절

밤새 서성거렸나 보다. 아침에 창을 열자 가을이 훅 들어섰다. 계절이 자기를 닮아가는 피부에 먼저 뺨을 비비자 이내 생각이 계절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지금, 인생의 계절을 생각하기 좋은 때다.

 

서가에서 여름내 읽기를 미루어 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마거릿 크룩생크’의 이 책은 512쪽짜리로 요즘 출간되는 일반적인 책들보다 대략 두 배쯤 되는 두께를 가졌다. 지난 여름나기가 참 힘겨웠고, 어리석도록 값어치 없이 시간을 쓰기도 했지만, 책 페이지 수에 지레 눌려 읽지 못했다고 핑계하기 좋은 두께다. 문득 아침 창을 넘어 들어온 가을이 이 책을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표지가 먼저 말했다. <나이 듦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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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나이 듦’을 생각하기 좋은 계절이다. ⓒ 50+시민기자단 장승철 기자

 

이제 ‘나이 듦’을 마주하자

가을이 들면 찾아 읽는 수필 가운데 ‘비원의 가을’이 있다. 그 글 끝에서 작가 윤오영은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 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라고 썼다.

 

작가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으나 마주 서야 바라볼 수 있고, 바라보아야 바로 알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다는 뜻을 적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힐끔거리는 곁눈질로는 무엇이든 바로 볼 수 없고 바로 알 수 없을 테니 올바로 대할 수도 없겠다.

 

누군들 ‘나이 듦’을 기꺼이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저 시간에 실려 가지 말고 ‘나이 듦’을 마주하자. ‘나이 듦’은 현실이고, 현실이니 마주 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건강한 ‘나이 듦’을 맞이할 수 있다.

 

신중년들은 ‘나이 듦’이라고 쓰고 ‘노화’라고 읽는다. 이쯤에서 벌써 마음 상하기 시작한 신중년들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과학적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노화는 중년 너머 인생 막바지에 맞닥뜨리는 비탈길이 아니다. 사람의 몸이란 십 대 후반을 지나면 이내 노화에 접어든다. ‘애들’ 말고는 다 노화를 겪는다는 뜻이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의 기울기가 가팔라지기는 한다. 그러니 노화는 외면할 대상이 아니며 노화를 말한다고 해서 마음 다칠 일도 아니다. 지금부터 나는 저서 ‘나이 듦을 배우다’에 담긴 마거릿 크룩생크의 통찰에 기대어 여러분과 함께 ‘나이 듦’을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 나름의 ‘나이 듦 마주하기’를 잇대어 놓으려 한다. 글은 몇 편쯤 이어질 것이다. 그 사이 우리도 ‘나이 듦’에 대한 나름의 혜안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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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의 계절은 가을 어디쯤일 것이다. ⓒ 50+시민기자단 장승철 기자

 

신중년이 살아내는 계절

사람들은 곧잘 인생의 시기를 사계절에 비유해 말한다. 그렇게 보자면 신중년의 때는 가을 어디쯤이라 하겠다. 우리 관념 속의 가을은 아름답고 풍요롭다. 채도가 한껏 높아진 나뭇잎 뒤에 서서 확실히 순해진 가을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찬란하다는 단어의 뜻이 선연히 빛난다. 과일 익는 향기가 흐뭇하고 곡식 여무는 소리가 즐겁다. 그러나 선뜻해진 기온에 몸이 움츠러드는 아침과 아쉽도록 일찍 어둑해진 저녁이면 가을이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지는 잎을 보고 있으면 존재와 관계와 소유의 두께가 한없이 얇아지는 삶의 현주소처럼 느껴져 가을이면 중년 이후 세대들은 많이 우울해한다. 

 

실제로 인생의 가을을 살아내는 우리 사회 속 신중년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고 안타깝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 신중년이 애매하게 원성을 듣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 모습을 잠깐만 들여다보아도 원망할 대상이 신중년은 아니라는 것쯤 이내 알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의 복리를 책임지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개인의 노후가 보장되기 힘든 사회이다. 

 

결론적으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 속에 신중년이 놓여있다. 이제까지 열심히 살아온 신중년은 노인 빈곤율 세계 1위라는 현실 속에 일터로 내몰린다. 노년이 되어서도 계속 일을 하며 그 소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뿐이 아니다. 노인 세 명 중 한 명은 혼자 지낸다. 높은 우울증과 자살률 그리고 고독사의 증가가 우리 신중년의 삶을 대변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 현실이 나아질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 절망스러운 현실이 고스란히 우리 자식 세대에 대물림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가중되어서 말이다.

 

노화의 특징

신중년의 나이 듦을 노화라는 특성에 맞추어 들여다보자. 사람의 노화를 말할 때는 사회적 특징과 개인적 특징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사회적 특징은 노년을 불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실제로 노년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화를 겪는 사람을 실제 능력이나 잠재성보다는 경제적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노년의 실제 능력이나 잠재력을 알지도 못하고 가치 매김도 하지 못하니 진정한 경제적 관점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그뿐 아니라 노화를 겪는 사람은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그들 전체를 단일 집단으로 싸잡아 규정짓는 어리석음을 고집한다.

 

또 다른 사회적 특징으로 노년에 대한 곡해가 있다. 정치를 포함한 사회적 시각은 노년을 경제 문제의 주범이라거나 다음 세대에게 피해를 주는 집단이라는 당치않은 편견을 미리 담고 있다. 특별히 인구 고령화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적 시각은 논리적이기보다 감성적이다. 이렇게 신중년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단지 노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개인이 겪는 노화의 특징으로는 신체와 심리적인 위축, 쇠약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총명하기가 이전 같지 않고 불평등 사회의 악조건에 눌려 우울하게 지낸다. 몸이 약해지니 행동이 느리고 마음대로 움직여 이동하지도 못한다. 언어도 자유롭지 않고 여러 가지 병으로 안타깝게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개인의 노화가 가지는 특징이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노년이 된 사람은 스스로 더 깊은 인격을 가질 수 있고 슬기로워질 수 있다. 가족과 일에 대한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라면 심신의 자유를 만끽하며 더욱 쾌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지나온 삶을 관조하며 자신이 이룬 일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하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렇게 해서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성숙을 이어갈 수 있다. 노년에 겪는 어려움을 운동과 스토리텔링 등으로 극복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회복과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균형감각과 조화를 지켜냄으로써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노화를 마주하여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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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계절과 석양을 마주할 용기를 갖자. ⓒ 50+시민기자단 장승철 기자

 

인생의 계절과 석양을 마주할 용기

나이 듦은 현실이다. 그 현실에 눈감고 사는 삶은 그저 시간에 실려 갈 뿐이다. 비록 세상은 노년을 경제에 치중한 실용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하지만 노년의 삶은 결국 많고도 다양한 신중년 개개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당치않은 편견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는 신중년의 삶은 마냥 슬프거나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가치 있는 삶을 성숙하고 건강하게 누릴 수 있다.

 

용기는 실행의 선행조건이다. 인생의 계절과 석양을 마주하는 용기가 우리를 아름다운 나이 듦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루 중 노을 진 하늘이 가장 아름답고 석양 들 때 찍은 사진이 가장 멋지다. 우리가 나이 듦과 함께 누리는 아름다움에는 끝이 없다. 

다음 편에서는 아름다운 노화를 맞이하기 위한 과제를 생각해 본다.

 

 

50+시민기자단 장승철 기자 (cbsanno@naver.com)

 

 

 

[슬기로운 신중년 생활] 


① '나이 듦'을 마주하는 신중년

② 아름다운 나이 듦을 위한 과제

③ 신중년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

④ 신중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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