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를 본차이나(bone china)라고도 부릅니다. 본차이나는 뼛가루(bone)와 장석, 고령토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도자기를 말합니다. 도자기를 ‘china’라고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도자기를 만든 나라가 중국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나라 이름과 도자기를 구분해서 소문자 china는 도자기를, 대문자 China는 나라 이름으로 표기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도자기를 만들었어요. 그것도 천 년 전이에요. 그다음이 일본인데, 우리보다 한참 늦은 임진왜란 후입니다.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고 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거든요. 유럽은 그보다 늦게 도자기를 만들게 됩니다. 유럽은 15세기경, 당시 세계적인 진품으로 인기를 누린 중국 도자기를 다량 수입하다 점차 자체의 제작소를 세워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적 요소들을 가미한 도자기를 생산합니다. 당시 보통 자기 한 점의 값어치가 7명의 노예와 맞먹었다고 하니, 자기는 고가의 귀중품이었습니다.

 

1+당삼채.PNG
▲ 당삼채. 백색 도자기 위에 적, 녹, 갈 3색의 유약을 바른 당나라의 유물

 

당대 사람의 마음이 담긴 도자기

도자기에는 당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재질, 모양, 무늬로 마음을 표현했지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출토된 그릇을 보면서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려청자에도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을 받던 때, 도자기 제작에도 원나라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원나라 양식이 들어와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와 문양의 도자기가 등장합니다. ‘청자상감금채원숭이무늬항아리’는 그야말로 시대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에 금을 입힌 것은 원나라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신이 원나라를 갈 때 가져간 공납품(고려가 원나라에 바치던 공물)의 주요 품목 중에 청자가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원나라의 영향을 받던 시기 왕의 이름엔 ‘충’자가 들어갑니다. 충렬왕, 충선왕 등이 그것이지요. 이때, 고려 정신은 사라졌고 궁궐에도 몽골풍이 차지합니다. ‘청자상감용봉모란문개합’은 뚜껑과 받침, 수저 등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사발 세트로 고려 왕족들이 쓰던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고려 가요 ‘쌍화점’을 들으며 이 찻잔에 맑은 녹차를 마시지 않고 쌍화탕을 마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2-1청자상감용봉모란문개합-horz.jpg
▲ (좌) 청자상감용봉모란문개합 (우) 청자상감금채원숭이무늬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새 시대, 새로운 시대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화재 혹은 고가의 골동품으로만 여겨지는지요? 도자기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신석기 빗살무늬 토기부터 청동기, 삼국시대 각종 석기를 비롯해 고려의 청자까지 모두 세상을 손에 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 사용되었지요. 새로운 도자기가 나왔다면 그건 세상이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청자가 만들어진 내력이 그렇고, 분청이나 백자 또한 세상이 바뀌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3.청자상감운학문매병.PNG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가 저물어갈 무렵 새로운 세력이 나타납니다. ‘신진사대부’입니다. 고려 후기에 등장해 조선을 건국한 사회 세력이지요. 이들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조정에 개혁을 요구하다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세웠습니다.

 

‘신진사대부’의 ‘사’는 공부하는 사람, ‘대부’는 관직을 얻은 사람을 뜻합니다. 대표적 인물로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하급 관리나 향리 집안 출신으로,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청빈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권문세족을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워진 백성의 살림이나 국가재정을 보살피기 위해 토지제도를 개혁해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세력인 신진사대부가 추구하는 정신은 도자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청자가 고려 귀족의 고요한 진리의 세계를 담아냈다면 분청은 소박한 저잣거리의 한가한 서민의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학문의 올바른 실천을 강조한 성리학 정신이 도자기에 담겼습니다.

 

고려의 권문세족이 불교를 통해 깨달음과 지혜를 얻고 해탈하여 죽은 뒤 극락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다면, 신진사대부가 받아들인 성리학은 현실 세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일상생활과 관련된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분청사기입니다. 분청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크게 발달합니다. 회색 또는 회흑색의 바탕흙에 백토로 표면을 분칠한 뒤에 유약을 씌워 구웠습니다.

 

4..분청사기상감어문매병.PNG
▲ 분청사기상감어문매병 ⓒ 국립중앙박물관

 

도자기에 도장 무늬가 나타난 내력

인화문 도자기, 즉 도장 무늬 도자기를 역사 속 어디선가 본 듯하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평화로운 시대에 나타났었지요. 도장 무늬 도자기는 무늬를 일일이 그리지 않고 도장으로 꾹꾹 눌러 찍어 문양을 만든 도자기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짐작할 수 있으세요? 그렇습니다. 도자기 수요가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일일이 손으로 그림을 그려서 수요를 댈 수 없었던 겁니다. 이는 또 도자기를 생활에 쓸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고려청자가 귀족과 승려를 위한 도자기였다면 분청은 대중을 위한 도자기였습니다.

 

5-1분청사기인화문호-horz.jpg
▲ (좌) 분청사기인화문항아리 (우) 분청사기인화문병 ⓒ 국립중앙박물관

 

도자기 수요가 늘면서 고려말 불과 41개에 불과했던 자기소(도자기를 굽는 곳)가 세종 임금 대에는 무려 324개나 됩니다.(참고: 역사를 담은 도자기, 고진숙) 바야흐로 역사는 도자기 전성시대가 된 겁니다.

 

고려청자가 제한된 가마에서 주문 제작이었다면 분청사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장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을 하게 됩니다. 역사는 어쩌면 동서양이 이리도 닮았는지요. 인상파 화가가 등장하기 이전 그림은 주문 제작에 의지한 것들이었습니다. 인상파 이후 화가들은 스스로 그림을 팔아야 했지요. 그 많던 그림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해 모진 고생을 하다 생을 마감한 고흐도 무한경쟁 시대를 살다 간 화가였습니다.

 

때마침 세종 임금도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을 새겨넣도록 했습니다. 장인들은 이제 이름을 걸고 더 좋은 도자기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온라인으로 홍보를 할 수 있는 지금과 상황이 매우 다른 600년 전의 일입니다. 도공들의 고민이 많았겠지요. 도공의 고민은 명품 도자기 생산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명품으로 평가받는 분청사기는 이때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6-1분청사기+상감운룔문항아리-horz.jpg
▲ (좌) 분청사기상감운룡문항아리 (우) 분청사기상감연화당초문병 ⓒ 국립중앙박물관

 

자유로운 영혼, 멋대로 분청 

고려청자 가마가 강진, 해남 등 남해안에 주로 분포되었던 것과 달리 분청사기 가마는 전국 각지에 있었습니다. 분청사기는 사람이 사는 곳 어디서든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에서 나는 흙, 사는 사람의 필요 등에 따라 모양도 무늬도 달랐습니다.

 

분청사기에 사용된 장식기법은 크게 귀얄·덤벙·박지·인화·상감·선각·철화가 대표적입니다. 차례로 살펴보면 먼저 귀얄분청은 풀을 칠하거나 옻칠할 때 사용하는 귀얄 붓으로 문양을 냈기 때문에 귀얄분청이라고 부릅니다. 1차로 구워낸 도자기에 백톳물에 담근 귀얄 붓으로 쓱쓱 발라 구우면 빗질 자국이 문양으로 남습니다. 이를 ‘귀얄분청’, ‘귀얄문 분청’이라고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도자기를 백톳물에 덤벙 담갔다 꺼내어 구우면 백톳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채로 구워집니다. 백토가 흘러내린 자국이 문양이 되었지요. 백토에 덤벙 담가 문양을 내었다 해서 ‘덤벙분청’ 혹은 ‘덤벙문 분청’이라고 부릅니다. 인화분청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도장을 찍어 문양을 표현했습니다. 상감분청은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기법인 상감청자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7-1분청사기귀얄문병-horz.jpg
▲ (좌) 귀얄문 분청사기 (우) 덤벙분청사기 ⓒ 국립중앙박물관

 

8-1분청인화문대접-horz.jpg
▲ (좌) 분청인화문대접 ⓒ 국립중앙박물관 (우) 분청상감모란버드나무문매병 ⓒ 네이버

 

박지문은 분청에서만 볼 수 있는 문양입니다. 그릇을 빚은 다음 그릇 전체에 백토를 바르고 문양을 그린 뒤, 문양 이외의 배경 부분의 백토를 긁어낸 뒤 그 위에 투명한 회청색의 유약을 발라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선각분청은 음각 분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자기에 백토를 바른 후 문양을 조각칼로 음각하고 연한 청색의 유약을 칠했습니다. 철화분청은 철의 붉은 색으로 문양을 넣어 그린 것을 말합니다.

 

9-1분청사기+음각어문편병-horz.jpg
▲ 분청사기선각어문편병, 분청사기철화인동문장군, 분청사기박지모란넝쿨문호 ⓒ 국립중앙박물관

 

청자는 신분의 상징으로 출현했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을 위한 주문 제작 그릇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마 또한 강진과 같은 특별한 곳에만 있었지요. 분청사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만들었고 지역에 따른 특색도 있습니다. 대략 전라도는 덤벙분청사기와 조화박지분청사기, 충청도는 철화분청사기, 경상도는 인화분청사기로 그 특색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기가 생존의 도구였다면 청자는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크게 발달했던 분청사기는 삶의 현장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백자에 담은 조선의 정신 

분청사기를 만들면서 도자기 기술도 거듭 발전해 갑니다. 기술 발전과 함께 일부 관청에서는 직접 가마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관청에서 운영하는 가마를 관요라고 부르는데, 경기도 광주에 있었어요. 관요에서는 궁궐에서 사용할 백자를 생산했어요.

 

이 무렵 나라에서는 백자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여겨 궁에서만 사용하게 하고 일반 백성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백자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가 커지면서 점차 백자 생산량도 크게 늘어나 조선 초기를 주름잡던 분청사기는 점차 운명을 다한 듯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제작되었어요.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청화백자가 대유행이었어요. 백자에 푸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청화백자라고 합니다. 당시 청화백자는 양쯔강 남쪽 경덕진 가마에서 생산했습니다. 경덕진에서 생산한 청화백자는 이슬람을 비롯해 유럽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어요. 조선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지요. 중국에서 밀수입까지 할 정도였으면 상감청자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조선의 도공들도 청화백자를 만들 법도 한데 만들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청화백자의 문양을 그리는 데 꼭 필요한 안료인 코발트는 고가의 수입품으로 대중이 쓰기에 너무 값비싼 물질이었습니다. 보라색 광물을 높은 온도의 불에 구우면 신비한 푸른색이 납니다. 광물이기 때문에 1,300도까지도 견뎌 하얀색의 백자에 그린 파란 무늬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조선의 상류 사회는 중국에서 청화백자를 수입해 쓰기 시작합니다. 세종도 더는 막을 수만은 없었는지 조선도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하지요.

 

10-1청화백자-horz.jpg
▲ (좌) 백자 청화 ‘홍치2년’ 명 송죽문항아리 (우) 백자청하운룡문 ⓒ 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 그림은 도화서 화원에게 그렸습니다. 그들은 선비 정신을 나타내는 사군자 즉,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소나무를 그렸습니다. 시와 산수화도 문양으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분청사기에 그렸던 자유분방한 문양 대신 백자에 관념을 그렸습니다.

 

청화백자는 고급 도자기입니다. 좋은 땔감이 필요하고, 좋은 흙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안료도 필요했고요. 이 얘기는 그런 도자기를 감당할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입니다. 세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도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누구도 갖기 어려운 도자기를 만들도록 세조는 관요를 설치하였습니다. 새로운 도자기 출현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력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참고자료

『국보』 백자·분청사기(정양모편,예경산업사,1984)

『분청사기연구』(강경숙,일지사,1986)

『역사를 담은 도자기』(고진숙,한겨레,2008)

『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1982)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0+시민기자단 김영문 기자 (aidiowna@naver.com)

 

 

김영문.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