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시작한 관요 사업의 성과는 성종 대에 이르러 빛을 봅니다. 성종은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을 완성하여 나라의 기틀을 완성합니다. 법전을 완성했다는 말은 나라의 체제가 정비되었다는 뜻이지요. 성종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대개 그 나라의 기틀을 완성한 임금에게 붙입니다. 

 

조선은 신진사대부들이 세운 나라였지만 이를 견제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합니다. 세조를 도왔던 한명회를 비롯해 훈구파가 그들입니다. 훈구파는 고려의 권문세족과 같은 문벌 관료들이며 청화백자의 소비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청화백자 수입을 금지했습니다. 대신 상감백자가 있었지만, 안중에 들지 않았지요.

 

수입을 금했으면 만들어야지요. 조선에서도 청화백자를 만들게 됩니다. 조선엔 두 번의 청화백자 붐이 일어났습니다. 성종 대를 전후해서 한 번, 후기에 정조 임금 이후입니다. 15세기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절정기는 그렇게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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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백자상감연리지문 대접 (우) 백자청화운룡문 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에 담긴 정신은 청렴결백한 선비 정신

조선의 선비는 청렴결백한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도공은 티 하나 없이 맑은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지요. 백토에 든 불순물 제거가 관건이었어요. 백자는 철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철분은 단 1%만 넘겨도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성분이어서 어떻게든 흙 속에 든 철분을 1% 미만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 땅에 커다란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땅에 우물처럼 구덩이를 파서 ‘땅두멍’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과학이 오늘날 같지 않던 시대, 도공들은 철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흙을 걸러내고 걸러내어 가벼울수록 더 하얀 백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공들은 땅두멍에 물을 채우고 흙을 가라앉혀 무거운 성분을 걸러내는 ‘수비’를 했습니다. 커다란 땅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고 흙을 풀어 기다란 막대기로 저으면 무거운 흙이 먼저 가라앉고, 그 위의 흙탕물을 채로 받쳐 내기를 거듭하며 철분이 없는 가벼운 흙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도공은 도자기를 만드는 고령토가 없었지만 이런 노력과 지혜로 순백의 백자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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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백자병 (우) 백자철화끈무늬병 ⓒ 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를 좋아한 훈구파에 맞서 등장한 사림파는 순백의 백자를 좋아했습니다. 사림파란 숲에 묻혀 학문의 닦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고려말 이성계에게 등을 돌렸던 정몽주와 길재의 후예들이지요.

 

훗날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이 갑자사화, 기묘사화, 무오사화, 을사사화 등 네 번에 걸친 사화로 드러납니다. ‘사화’란 사림파 사람들이 화를 입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화를 겪은 사림들은 다시 숨어들어 학문에 정진합니다. 그들은 교육을 중시 여기는 사람들로 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향약을 통해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우리가 ‘선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사림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림들도 청화백자를 소유했습니다. 사군자를 백자에 담아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정신을 그린 듯합니다. 소나무 아래 먼 곳을 응시하는 인물에서 와신상담하는 모습이 보이는 건 저만 그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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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

“일본 도예명가 심수관, 424년 만에 ‘뿌리’ 찾아 한국 방문” 중앙 일간지 제호입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도공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끌려간 후 세계가 인정하는 ‘도예명가’의 기반을 다진 심당길 장인의 후손이 424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입니다.

 

1592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은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들 일본인 중에는 사쓰마 영주도 있었고, 아리타 지방의 영주도 있었습니다. 많이 들어본 지명인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자기 ‘아리타 도자기’, ‘사쓰마 도자기’가 태어난 곳입니다.

 

대한해협을 넘은 왜군은 닥치는 대로 도자기를 훔치고 도공을 납치해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때 끌려간 도공들이 아리타와 사쓰마 지방에 조선인 마을을 이루고 그곳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중국, 한국에 이어 세 번째로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됩니다.

 

이들 도공이 제작한 도자기가 당시 일본판화 우키요에로 포장되어 네덜란드로 가는 무역선에 실리게 되지요. 포장지였던 우키요에 영향을 받은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일본이 오늘날 도자기 강국이 된 시초는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에 의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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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 ⓒ 사가현관광 홈페이지

 

사옹원(조선시대에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분원을 만들어 왕실 자기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백성은 백성대로 백성의 그릇을 만들어 썼습니다. 도공들은 청자 만들기 어려운 흙으로 분청사기를 만들고, 백자 만들기 어려운 흙으로 막사발을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막사발이 백성의 그릇입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인지 모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왜병들은 조선은 강아지들조차 도자기에 밥을 주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해요. 그들은 막사발도 마구 가져갔습니다. 그때 가져간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고 해요.

 

조선의 청자며 분청이며 수많은 도자기를 만든 이 땅의 도공의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술가가 아니라 기능공이었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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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다완 ⓒ 조선 막사발과 이도다완, 정동주

 

달항아리가 만들어진 사연

두 번의 왜란을 겪고 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신봉해온 성리학이 과연 옳은 것인가.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지요. 전쟁이 끝나고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손도 대지 못하는 현실에 회의하기 시작한 겁니다. 실학이 등장하는 계기였습니다. ‘경자유전’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가져야 나라가 산다,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조선을 다스렸던 성리학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올바른 답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랑캐라 업신여겼던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를 들여오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대오각성합니다. 나라에서는 대동법을 선포하고 관청에서는 그동안 백성들로부터 받아왔던 공납제를 바꿔 필요한 물건을 백성에게 받은 세금으로 상인을 통해 사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달항아리는 그런 시대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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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달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는 조선의 대표적 자기이지요. 백자의 으뜸은 역시 달항아리입니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자기가 보름달을 닮았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달을 닮은 원호라고 해서 모두 달항아리는 아닙니다. 높이가 40cm는 돼야 달항아리 자격이 있습니다. 한데 당시 기술로 백자 특유의 흰색을 내면서 40cm 이상 큰 항아리는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도공은 달항아리를 한 번에 빚어 올리지 않고 위아래 몸체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였습니다. 각각 만들어 이어 붙인 것이어서 굽다 보면 몸이 틀어지기도 해서 위아래, 좌우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 않기도 했습니다.

 

달항아리가 제작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18세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은 16세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크게 대립한 네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순백자’를 제작하고, 18세기 세 번의 ‘환국’을 넘을 때 순백의 달항아리를 제작하지요. ‘환국’이란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환국은 총 세 번 발생했는데, 환국을 통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등 붕당 정치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격심한 싸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두 판을 이어 붙여야 하나가 되는 달항아리가 당파싸움의 절정기에 나타난 것이 그저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나라의 운명을 닮은 도자기 

한편 임진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의 백자는 산화철을 안료로 하는 ‘철화백자’를 제작합니다. 철화백자는 우리나라 고유의 백자입니다. 세종 시대에 처음 철화백자가 만들어졌다가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철화백자의 등장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중화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며 청을 쳐서 명나라의 은혜를 갚자고 하던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코발트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청나라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만든 것이 철화백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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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문가들은 조선 초기 청화백자와 후기 정조 임금 대의 청화백자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도자기 위와 아래에 같은 문양을 넣은 것으로 분별합니다. 이 문양은 광주 분원리에서 만든 것이라는 이름표와도 같았습니다. 도자기에는 세종대의 문예부흥과 안정감, 자신감이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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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청화산수문 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실용에 관심이 많았던 선비들은 도자기도 실용을 강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백자 필통과 연적은 필수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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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청화백자매죽문필통 ⓒ 국립중앙박물관 (우) 청화백자철화나비문연적 ⓒ호림박물관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이 오래가길 바라면서 구름과 학을 그린 청자를 만들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같은 마음으로 십장생 그림 도자기가 나옵니다. 십장생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열 가지 사물을 가리킵니다. 십장생을 그린 도자기를 가지려던 사람들은 순조 임금 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집안이었습니다.

 

한편 새로운 부자들이 등장하면서 고급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합니다. 도공들은 돈이 되는 도자기 만들기에 열심이었고, 나아가서는 왕실 도자기보다 품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지요. 보다 못한 고종은 1884년 관요를 포기했고 중국 도자기를 정식으로 왕실 행사에 쓰는 일이 생깁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값싼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 왔는데 그중에 도자기도 있었습니다. 일본 도자기 앞에서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고 도자기도 운명을 다하고 말았습니다.

 

참고자료

『국보』 백자·분청사기(정양모편,예경산업사,1984)

『분청사기연구』(강경숙,일지사,1986)

『역사를 담은 도자기』(고진숙,한겨레,2008)

『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1982)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0+시민기자단 김영문 기자 (aidiow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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