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가 지나지 않아 영주가 그리웠다. 이끄는 손길에 마음을 맡겼다. 영주를 찾는 세 가지 이유를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유천동’ 영주역에서 출발하였으나 이번은 ‘휴천동’ 영주역사에서 출발하였다. 휴천동의 동명을 오기한 것이다. 가는 경로는 가흥교 방향이 아닌 1961년 대홍수 시에 일조했던 영주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구 원당천을 메우고 새길을 낸 원당로를 통하여 구역(舊驛)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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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누가병원이 신축되던 당시 건물 앞에 다리 위로 흙먼지를 날리면서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사진의 다리는 원당천의 복개로 쓸모가 없어졌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원당천은 지금은 찾을 수 없고 그 자리는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당연히 원당천 동서를 연결하던 다리도 사라졌다. 흙먼지 날리던 시절 홀로 우뚝 5층의 높다란 건물은 지금의 성누가병원이며 건물 앞의 다리 사진으로 보아 원당천이 이 아래로 흘렀구나 짐작될 뿐이다. 

 

구 영주역 자리에는 지금 중앙시장이다. 구역의 내음이 중앙시장 어디엔가 배어 있을 것 같다. 50~60년대 호황을 누리며, 이 역 앞을 연기처럼 가득 메웠을 시끌벅적한 장터와 같은 풍경을 그려본다. 구역(舊驛)을 품은 영주중앙시장이다. 시장을 한가로이 거닐어 본다. 영주의 전역인 풍기에서 보았던 인삼의 간판도 보인다. ‘영주’하면 당연히 따라오는 부석사와 소수서원 그리고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은 이번도 슬쩍 미뤄본다. 오직 앞 글자 영주만을.

 

그러나 중앙시장에서 영주하면 떠오르는 사과가 생각났다. 소백산의 낮은 기온과 풍부한 일조량으로 일교차가 커서 사과의 생육에 최고라는 명성을 날리는 사과의 산지인 영주. 단양을 지나 풍기로 들어서면서 열차 차창에 비치는 농협 건물에 ‘아이 ♡ 영주 사과’라는 글자가 영주 사과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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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역이 있던 곳에 2003년 중앙시장의 모습과 지금의 영주중앙시장과 365시장이 활기차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영주의 특산물 사과 중 햇사과 아오리를 입에 물었다. 맛은 머리가 먼저 알아챈다. 역시 최고의 맛을 저버릴 수 없다. 사과를 몇 알 주머니에 담고 플랫폼에서 증기기관차의 빼액거리는 소리와 디젤기관차의 육중한 기계음, 전기차의 다소 세련된 소리가 뒤섞여 탄전으로 떠나는 광부 검은 얼굴에 다부지게 이번엔 한몫을 챙기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묵호에서 태백산맥을 넘어온 어물전 상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만남과 기약 없는 이별에 눈물을 숨기면서 치마 끝을 끌어 올리며 나서는 여인을 뒤로한 채 중앙시장을 아니, 구 영주역을 나서고 있다.

 

구 영주역에서 분수대 삼거리까지 걸으면서 대폿집과 식당, 여인숙이 줄줄이 늘어서 역전통을 이루었다는 류 작가의 이야기대로 지금도 여전히 대폿집도 식당도 여관도 있다. 다만 그때 살던 사람만이 바뀌었다. 비록 옛 사진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그때의 웃음과 고통이 지금의 기쁨과 아픔으로 바뀌어 고스란히 이곳에 담겨 있다. 우리는 삶에 분주하여 그것을 회상하지 않고 여태껏 있었나 보다. 호경기 시절의 소란스러운 호객 소리가 지금도 또렷이 들리는가 싶다.

 

시장을 벗어나 역전통을 걸으면서 오늘 이 여행에서 찾으려 했던 역 앞의 부산스러움과 다 알지 못한 정겨운 눈빛을 지금 서 있는 건물 틈새에서 훔쳐보고 있다. 시대별로 살아간 지표에서 보지 못하던 사실을 지층에서 확인하듯이 구역(舊驛)에서 분수대 삼각지로 가면서 옛것을 하나하나 마음에 채우고 있었다. 어느덧 발길은 분내를 풍기면서 요염한 웃음을 흘리는 염매시장도 힐긋거리면서 헐어빠진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문지방을 건너면서 휑하게 뚫린 창문 앞으로 지금도 여전히 물을 뿜어 대는 분수대를 보면서 영주에 와서 경북선이 개통되던 1960년대 호황기의 역전통에 빠져있었다. 신비로운 시간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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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통 앞에 영주시 도시재생 선도사업으로 조성된 영주근대역사체험관을 비롯하여 여기서부터 실질적으로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시작된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이 역전통을 옛 모습으로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 계셨다. 바로 영주근대역사체험관 김시용 관장님이다. 영주시는 과거의 낡고 헐어 볼품없던 적산가옥을 다시 정비하여 옛 모습과 함께 당시의 호황을 이끌기 위해서 특별히 1955년 세운 후생시장의 옛 모습을 복원하여 많은 상점이 그 자리에서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을 꿈꾸고 있다. 체험관에는 후생시장의 개장과 쇠퇴 그리고 도시재생사업으로의 지금의 모습 뿐 아니라 영주의 시대별 모습을 다양한 자료로 체험할 수 있을수록 꾸며져 있다. 

 

이곳을 찾는 많은 학생에게 근대역사 뿐 아니라 영주의 선비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안양(1243~1306)과 주세붕(1495~1554)의 생애를 통한 유교 사상과 태조로부터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 칭함은 물론 조선의 설계자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조선 창업자라는 말도 덧붙여진, <조선경국전>을 짓고 <불씨잡변>을 써서 법률의 체계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민본사상을 구현시킨 정도전의 선비정신도 함께 함양하고 있다. 근대역사체험관을 나와 옆 건물로 나서면 바로 소백여관이 있다. 아담하여 정겹고 정갈하다.

 

지금 후생시장의 선비골 오백빵집 자리에는 영신양복점이, 이전에는 후생약국이 자리를 지켰다. 그 곁에 여왕 의상실은 더 오랜 시절을 그 자리를 지켰으며 지금 그 자리에는 라인업 속옷점이 영업 중이다. 옛 시절 함께 했던 복만 아귀찜, 대한상회, 음악세계, 소백야식, 서울여화점, 만금사, 실로암 안경점 주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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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후생시장의 변화의 모습과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부활한 현재의 후생시장의 모습.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중앙선 개통 시 중앙시장 부근인 후생시장은 전국적인 고추 시장이었다. 지금도 후생시장 한 골목 가게에 고추가 널려있다. 해방 후 1955년 일본식 적산가옥 형식을 빌려 개장을 했다. 후생시장이란 ‘주민 생활이 윤택해질 때까지 돕는다’라는 지금의 사회복지적 정신이 창호지처럼 스민 이름이다. 1970년대 초까지 영주에서 가장 번창했던 이곳은 그때의 상호를 쓰는 청주집과 역전유리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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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여관의 출입문에 가득 적힌 감사의 글을 읽고서 이곳 사장님의 방문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지난밤을 보내고 간 방문객과 같은 느낌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근대역사체험관 제공 

 

1960년 소백여인숙으로 시작된 소백여관을 리모델링하여 다시 문을 연 소백여관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명함으로만 주인 조성원 님을 뵈었지만, 그 선선함과 정성으로 방문자 한분 한분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베푸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룻밤 잠자리였지만 내일의 여정으로 짐을 싸기 바쁜 시간에 정성껏 편지를 써서 전달한 마음 마음에서 소백여관의 마음 씀을 곁에서 함께 느낄 수 있다. 이유 없이 영주를 다시 찾아서 지난밤을 보내고 간 방문객과 같은 느낌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정신이 영주의 르네상스를 열어가는 정신이라 생각된다. 영주에 빠지는 또 하나의 서천. 아담하여 정겹고 정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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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분수대 로터리 모습과 분수가 오르고 있는 지금의 모습.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청 제공 

 

역전통이 끝나는 삼각지 분수대 지금 보이는 분수대는 이전 조흥은행 옆 가로변 삼각지로 나무도 심고 분수를 설치하여 분수대로 불려왔으며, 1970년대 설치했다가 철거되었던 것을 2004년 다시 설치하여 지금에 이른다. 분수대 뒤편에 수해복구비가 있는데 비의 높이가 1961년 수해 당시 물의 높이라고 한다. 엄청난 홍수임이 직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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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조흥은행 자리에 현재 신한은행이 영업 중이다. 두 개의 건물이 공존하는 삶의 지혜가 아쉽기만 하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분수대 삼거리 신한은행 자리는 과거 조흥은행이 있던 자리이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조금 괜찮았다면 저 육중한 은행 건물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도시 감각에 어울리는 현재의 건물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이나마 그런 아쉬움을 공감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며,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음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쉽지만 모든 것이 변화하고 변화의 핵이 발전과 진보의 한 축으로 그 힘을 가지고 우리가 존재한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분수대 삼거리에서 북쪽 철탄산 쪽으로 향하면 눈에 빤히 영주초등학교가 보인다. 걸어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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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원표 이정표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던 영주초등학교와 신사골.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매일 아침 신사참배가 이루어졌다는 영주초등학교와 뒤편 철탄산 기슭 마을을 신사골이라 부른다.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오가 우리 민족의 황민화를 강요하면서 군마다 신사를 만들어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셔 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영주초등학교 교실 옆에 영주의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가난한 사람이 이 골짜기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서 이곳을 신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골은 강점기 신사가 있던 곳이지만 한국동란 시 주민들의 총살 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신사골에 얼마나 아픈 주검들이 고통으로 신음하였을지 불볕더위가 몰아치는 여름이면 6·25전쟁의 아픔이 더위와 함께 폭우처럼 쏟아진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 없어야 한다는 구호를 종종 꿈속에서도 외쳐댄다. 영주초등학교 앞에는 도로원표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1914년 도로원표 지정 당시 영주초등학교 앞은 영주시의 중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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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탄산 자락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향교와 그 곁에 영주여자고등학교의 모습.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영주초등학교에서 철탄산 자락의 야트막한 오르막길 위에 영주향교가 자리한다. 선비의 고장에 걸맞게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등이 중수 및 보수되어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배롱나무꽃이 화사한 모습과 햇볕마저 고운 이 교육시설은 1368년(공민왕 17)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워졌다. 학교에서 인재들이 양성되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참 좋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과 그 곁에 1952년 영주중학교로 시작한 영주여자고등학교가 지금도 그 학맥을 이어가고 있구나 싶어 흥미로웠다. 영주여고는 작년 8월 27일 3학년 학생 전원과 교원들이 함께 창작시집 ‘열여덟, 한없이 예쁜 날들’ 2집 출간을 하였다고 하니 흐뭇하다. 전원이 이러한 마음을 담아 시집을 출간함으로 보아 아마도 영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은 650여 년 영주향교의 학풍을 이어가고 있겠다 싶은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향교와 영주여자고등학교를 나서서 다시 영주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옛 영주경찰서 민원실에 재미난 이름표를 단 영주문화파출소가 있다. 파출소라는 명칭에 지레 겁을 먹고 멀리 피해 가는 일은 없어야 할 일이다. 옛 경찰서의 민원실 건물 외관을 이용하는 것과 내용으로는 영주문화의 속살을 파헤쳐볼 수 있는 무척이나 반짝이는 재치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영주문화파출소는 영주문화사랑방, 영파 작은도서관, 영주 도시재생 안내소를 겸하고 있는 곳이다. 찬찬히 한번 들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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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이름을 지닌 영주문화파출소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영주제일교회.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이곳에서 다시 발길을 옮기면 하늘 높이 첨탑과 함께 고딕 건축 양식의 교회를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이 영주제일교회다. 영주제일교회는 2018년 8월 6일 국가등록문화재로 720-6호로 등록되었다. 제일교회는 1907년 3월 정석주 집에서 기도 모임으로 시작해 1909년 구성공원 인근에서 초가 3칸을 구입, 경북노회에 가입하면서 영주교회가 설립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목회자가 옥고를 치르고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 후 1954년 5월 1일 신도들의 노역 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된 영주지역 유일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빌린 절충양식의 건축물이다. 우리의 가난과 어둠의 시절 이곳을 통하여 신앙과 교육의 역할을 하였을 영주제일교회는 최근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영주제일교회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추억이 물컹한 풍국정미소가 보인다. 정미소에서 쿵쿵거리는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정겨웠는데, 이제 그 소리는 소리박물관에서나 들을 수 있을지 싶다.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아득한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옛 추억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곳, 풍국정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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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한 기분으로 감싸는 풍국정미소. 저 기계를 통해서 탄광지역 광부들의 쌀이 도정되던 시절의 힘차게 돌던 도정 기계 소리와 발동기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듯.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풍국정미소는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720-5호로 지정되었다. 1920년 근대 산업 시기부터 운영된 정미소다. 어릴 적 시골길을 가다 보면 마을마다 눈에 띄는 것이 정미소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눈 아래서 사라졌다. 아직도 쓰던 기계가 가동은 어렵겠지만(그러나 전원을 넣으면 씩씩하게 돌아간다고 말씀하신다) 형체가 온전히 남아 양곡 가공과 곡물 유통 등을 주제를 살필 수 있다. 정미소의 규모, 건축형식과 설비, 구조 등과 시설물을 볼 수 있다. 신기한 나라의 신기한 물건을 보듯이 벽과 천장 기계와 바닥을 둘러보는 맛이 그윽하다.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피대가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 속에 여기까지만이라도 지켜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주인은 우기섭 씨로 1966년부터 운영을 시작하여 2016년 폐업을 했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를 도정하면 두되 반을 도정비로 받았다고 하며, 정미소에 쌀 1,000가마를 보관할 수 있다고 하는 풍국정미소이다. 영주에 유독 정미소가 많았던 것은 태백 등 탄광지역 광부들의 주식으로의 쌀이 여기서 상당한 부분 도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도기로 밀리미터로 계산된 구조물이 아닌 목재로 만들어진 정미 기계를 보면서 우주를 날아가는 초음속의 힘도 이러한 목제 기계의 힘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미소를 나와 조금 더 걷다 보면 영광이발소가 보인다. 등록문화재 표지가 입구에 붙어있다. 

 

풍국정미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영광이발관이 등록문화재 제720-4호로 등록되어있다. 8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킨 영광이발관 이름 그대로 무궁한 영광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0년의 역사를 넘기며 지켜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종수 선생님의 말씀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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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창에 갇혀있는 유물이 아닌 지금도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영역을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등록문화재 영광이발관 장인 이종수 선생님이 쓰시는 오래된 이발 도구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우리는 과거 많은 문화유산을 박물관의 유리장 속에서 보아왔다. 조금 전 풍국정미소도 지난 삶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기계가 움직이지 않아도 말이다. 문화재의 힘이 아닐지 싶다. 지금 들른 영광이발관은 유리창에 갇혀있는 유물이 아닌 지금도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영역을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등록문화재로 이 자리에 있다. 우리가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다양한 개인의 가치와 철학이 적용될 것이다. 부유하다 해도 천박한 문화나 문화의식을 지적하는 때도 있다. 물론 문화에 높고 낮음을 구별할 수도, 해서도 안 될 일도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방치되다시피 한, 날것으로 옷도 못 입고 벌거숭이 문화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라는 대목이다. 이제는 지자체마다 문화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 바람직하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너무 과하게 포장과 장식을 해서 문제인 경우도 있다. 몇몇 문화재는 현대로 너무 미끈하게 화장해 놓은 모습 때문에 옛적의 기억을 훼손시키기 싫어서 더는 찾지 않는 곳도 있다. 서울의 경우 죽어있던 것도 문화의 이름으로 아니 차용하여서 개발하고 포장하는 예도 있지만, 다행스럽게 우리의 삶이 이것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상황이라고 본다. 영광이발관이 살아있는 문화재로서 100년의 명찰을 달고 이 자리에 씩씩하게 존재미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분화된 문화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물 발굴 보존과 더불어 살아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대응에는 또 다른 구별된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노포가 백 년 이백 년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접근하는 문화재 보호 정책도 지층에 갇혀있는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 같은 비중의 관심과 배려로, 살아있는 문화재도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지원도 곁들여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머리가 적당히 자라면 영광이발관 이종수 선생님을 뵈러 영주행 열차표를 예매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광이발관을 나와서 관사골로 향한다. 관사골 역시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관사골은 구역에서 도보 10여 분. 영광중학교 담을 거쳐 천천히 오르면 쉽게 관사골을 만날 수 있다. 문화거리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안내도에 표시된 관사들을 요모조모 뜯어보아도 좋을 일이다. 오늘은 5호 관사에서 특별행사가 있다. 특별행사란 집주인 강영욱 님께서 그동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관사에서 생활하실 계획으로 오늘 집을 리모델링 하는 날이다. 덕분에 집안 구조를 세세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공사가 진행되어 내부의 원형은 철거되었지만, 관사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관사 밖 풍경은 의외의 느낌이었다. 포근하고 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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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사가 고쳐지는 중 관사 안에서 바라본 앞마당의 모습이다. 저기에 자라는 나무들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보질 못했다.

다음에 가면 관사와 같은 나이를 먹은 친구들이 있는지 만나고 싶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생각보다 견실하게 지어졌다는 주인의 이야기가 새삼 고마웠다. 이곳에 친구들이 수백 명이 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서울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까지 다 마치고, 관사골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리라. 이제 5호 관사는 주인이 거주하는 살아있는 싱싱한 관사가 될 것 같다. 앞마당에 자라는 꽃나무들도 그리운 사람의 정을 받으면서 아침과 저녁을 맞이할 것이다. 저들도 즐거움에 오늘 밤을 설치겠다고 생각해본다. 사람이던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다 함께 살아야 하겠다. 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관사 앞마당에는 더 푸르고 싱싱한 나무들이 듬뿍듬뿍 커나갈 것이다. 5호 관사가 따스해졌다. 5호 관사 위편에 있는 7호 관사는 국가등록문화재 제720-1호로 지정되었다.

 

관사골은 1940년 영주에 중앙선 철도 개설과 함께 영주역의 철도 종사자들의 관사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중앙선 남부 공구는 안동을 지나 1941년 영주까지 개통하고 이듬해 4월에 영주~제천 구간의 개통으로 중앙선 전 구간이 완성되므로 영주역 관사도 이즈음에 건립 추정이다. 당시 총 13동의 관사가 세워졌으며, 1호 관사는 관사골 입구에 한 가구만 사는 단독형으로 세워졌다. 2호 관사는 주도로에 바로 접한 집으로 2호 연립형 7등을 관사이다.

 

1961년 7월 11일 대홍수로 영주 시내가 물에 잠기면서 당시 이재민이 1만5천 명 정도로 영주 읍내 인구의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 이 대홍수로 인해 영주 시가지는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박정희 장군은 서천의 물줄기를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원래 서천은 지금의 구학정 정자가 있는 영주 가흥동 산자락을 굽어 돌며 흘렀는데 이 산자락을 잘라 (지금의 구학공원 왼편) 직강화하고 과거 하천부지는 메워서 시민회관 및 주택용지로 활용했다.

 

1967년 12월 20일 지금의 휴천동 영주역이 완공되었으나 즉시 대체하지 않고 일정 기간 두 역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구역과 신역이 공존하다 1973년 12월 23일에 지금의 영주역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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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사골의 전체적인 풍경은 다소 어수선하였지만, 골목 사이를 누비면서 관사 하나하나를 찾아볼 때 느낌은 영주역의 중추적 역할과 더불어

철도직원의 관사가 주는 그 시대의 소리를 조용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최근에 코로나로 인해 경제활동이 위축된 예술인들의 생계 지원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지역 특색에 맞는 공공미술(문화뉴딜)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철도 관련 콘텐츠 조형물도 설치하면서 지역 특색을 갖춘 명소로의 발굴림이 있었다.

 

관사마을 초기 13동의 규모에서 이후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집들로 달동네처럼 어수선한 풍경을 연출하던 관사골이 지금의 환경을 가질 수 있음은 영주의 학생들과 한국해비타트, 신영주로타리클럽이 함께한 주거개선환경사업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거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주만의 관사골 풍경을 연출한다. 관사골 언덕 위에 있는 카페들도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최근 벽화와 골목 바닥까지 색색이 깔끔하게 정돈하여 관광객을 편하게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는 이러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영주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관사골에서 한 걸음씩 높이를 올리면 숨이 차지 않을 시간에 부용대에 다다른다.

“고청산 부용공원 남쪽 절벽을 부용대라 한다. 옛날 서천의 물길이 이 절벽 아래를 휘감아 구성공원 쪽으로 흘렀다. 조선 명종 때 풍기 군수로 있던 이황이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옛 선비들의 화용월태(花容月態)인 부용을 선비들의 표상이라 생각하며 정원에 심어 완상했다. 그리고 무궁화가 대한민국 꽃이라고 말살을 피웠던 일제강점기 때에 독립운동가들은 무궁화를 닮은 이 꽃으로 애국심을 달랬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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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공원 안에 있는 부용대, 넉넉하게 영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부용이라 불렀을까!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영주를 사방에서 조망하기에 좋은 부용대를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까이 있는 카페에서 차 한 잔을 손에 잡고 다른 느낌으로 다른 영주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부용대를 내려와 이석간 고택을 찾았다. 보존과 관리상태가 큰비라도 내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이만큼 유지되고 있음도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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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간은 ‘이석간 경험방’ 등으로 식치방을 치료 방법으로 제시한 조선 사의(四醫) 중 한 명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이석간(1509~1574)은 조선의 성리학의 인간관인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는 철학에서 ‘몸’의 수련으로 범위를 확대한 명의였다. 유교의 정치 이념과 도덕의 준수를 심신 수양에 기초한 유의였다. 이석간은 유학과 더불어 의학에 밝은 사람으로 성리학과 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의서로 이석간방(李碩幹方), 삼의일험방(三醫一驗方),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등이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사의(四醫)의 한 명으로 사의경험방에 등장하는 최고의 의학자였다. ‘사의경험방’은 조선 인조 말에서 효종 때 걸쳐 명의로 이석간, 채득기, 박염, 허임 등 4명이 남긴 임상에서의 경험 처방을 한곳에 모아 병증별로 분류한 것이다. 당시 고가였을 한약재 사용이 어려운 서민에게 밥이나 죽을 이용한 식치방이라는 이석간의 치료 방법 제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석간은 명나라 황태후의 괴이한 병을 고쳐주고 중국 황제가 하사한 천도 술잔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관직보다도 평생 초야에 묻혀 전래 되어온 각종 의서를 읽으며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의학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이며 ‘농암집’에 “이석간은 퇴계 문하로 퇴계 임종 시 마지막 첩약을 지어드렸다”라고 기록했다. 이석간은 경험방에 “오리는 성질이 따뜻하여 위를 튼튼하게 하며 녹두죽은 오장을 조화롭게 하지만 성질이 차가우니 많이 먹지 말라”라고 했다.

 

영주시는 유의 이석간 선생의 식치의서 ‘이석간 경험방’을 바탕으로 수행한 많은 연구에 관한 내용을 고증하기 위한 학술용역 보고회도 갖는 등 조선시대 영주시 식생활과 전통 의학과 선비 음식 및 영주 식문화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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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아-손택수, 못-김순분, 폭포-김금래, 행복2-나태주, 틈만 나면-박일환,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영광중학교 펜스에 걸린 시와 함께.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이석간 고택에서 구학공원의 제민루를 떠올리며 나서자 영광중학교 담 높이에 예쁜 시가 매달려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읽고 감동할 시 여섯 편이 발길을 잡는다. 천천히 무궁화 열차속도로 읽고 또 미소 짓고 응원하며… 담장에 함께 매달려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이런 시를 마음에 담고 자라는 영광중학교 학생들이여! 그대 영광이 있으리라….

 

“폭포-김금래//절벽에서/거꾸로 떨어져 봤니?//바닥을 치며/울어 봤니?//부서지며 나비처럼 날아올라//무지개를 만들어 봤니?”

학생들의 등하굣길 학교 담장 펜스에 그 어떤 교훈보다 큰 사랑의 시를 적어 놓으신 선생님의 마음으로 조금은 피곤했을 발걸음에 파란 마음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옛 영주극장을 떠올리면서 찾아온 롯데시네마 극장은 ‘영주에 이런 규모가?’ 할 만큼 의외였다. 역시 옛날 영주극장의 후광이 남아있는 듯싶었다. 돌아갈 열차 시간을 조절도 할 겸 옛 영주극장인 양 영화 한 편을 보러 달려왔으나 시간이 맞지 않는다. 귀경 열차 시간 내에 볼 수 있는 영화가 없어 영화감상은 다음을 기약한다.

 

옛 영주극장은 역전통 삼각지 부근에 목조 2층 건물이었다. 1930년 일본인이 지었던 공회당으로, 1950년대 중반 영화관으로 변모하였으며 영주가 영동선의 도계탄전, 경북선의 문경탄전 등 탄광지역의 무연탄을 석탄산업장과 수도권 등으로 실어 가고 이 지역의 소비재를 실어 나름으로 영주는 농산물, 임산물, 지하자원, 수산물의 집산지이자 유통지로 커다란 부를 이루었다. 당시 영주극장의 수용인원이 600여 명이라고 했다. 이는 대구의 제일극장 다음으로 경북 일대에서 순위 2위의 규모라 한다. 이는 경북 북부 및 강원 남부 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주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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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주극장과 현 롯데시네마 극장. 지난 과거 역전통의 활기가 부활할 것을 확신한다. 그러기를 바라면서 떠나는 영주 롯데시네마.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지금 영주의 인구로 롯데시네마가 당시의 위치는 아니지만, 이 규모의 영화관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움이 들었다. 이전에 보아온 시장들의 활기와 비교해 보니 영주의 영화관 명성은 당시 영주극장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영주는 1970년대까지 크게 팽창하여 1980년대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하였으나 1975년 17만 3,977명에서 인구는 감소하여 1990년 14만 889명, 2018년 10만 6,801명, 2020년 4분기 현재 49,718세대에 10만 4,012명으로 지속해서 감소하면서 사회·경제적 지속적인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재생사업과 신 영주역을 기반으로 철도교통의 중심축으로 그 영광을 다시 찾으리라 믿는다. 영주의 바닥에 깔린 꿈틀거리는 의지를 엿보았다. 여행객은 반드시 영주를 방문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지만, 과거를 읽는다. 사람을 볼 때도 지금 이 사람은 과거 어떠한 고난을 덧입고 있었는지? 어떻게 그 힘듦을 벗어 냈는지? 그래서 과거에는 힘이 있다.

영주의 지금을 보지만 과거를 찾고 싶다. 그때의 풍경도, 그때의 사람도, 그 어려웠던 시절을 보면서 지금의 영주를 알고 싶다. 영주는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왜 역사와 문화에 열광을 하나. 그 속에 내일의 우리가 오밀조밀 박혀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우리를 찾아내는 일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오류와 과오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고집하지 않고 성찰하며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고 진행되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인 머리가 수북할 즈음 영주에 있을 것이다. 영광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으며 영주를 듣고 영주를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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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영주시. ⓒ 영주근대역사체험관 제공

 

영주시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옛 직원의 이름이 영주여서, 류혜숙 작가가 쓰신 영주역이 보고 싶어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 찾았던 영주시. 철도의 중심축으로 번영의 시간과 대홍수의 이름으로 도시가 아팠던 시간도 잊고, 도시 서쪽에 새롭게 자리를 잡고 맑고 빛나게 흐르는 서천과 휴천동 영주역에서 구역까지 오면서 만난 분들의 따스함이 깊었던 선비의 고장 영주는 수많은 자랑거리와 더불어 오랜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를 두르면서 더욱더 키를 높이는 것을 하늘에서 보았다.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saeunm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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