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으로도 아릿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도봉동 무수골은 가을이 되면 꼭 빠뜨리지 않고 찾아야 할 숙제 같은 곳이다. 가을뿐 아니라 사계절 어느 때라도 혼자라도, 둘이라서, 셋이라면 더욱 좋을 가벼운 산책길이나 캠핑 길로 아니면 텃밭을 가꾸는 길로도 안성맞춤이다. 

 

무수동은 행정구역상 도봉구 도봉동 104번지에 해당한다. 무수울, 무시울, 모시올, 모시울, 서낭당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1900년 초에 무수동이라는 명칭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아홉째 아들 영해군의 묘가 무수골에 있다. 세종이 생전에 아들의 묘에 왔다가 원터(도봉1동 578번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하여 무수울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 500여 년 전 본래의 마을 이름은 수철(水鐵), 즉 무쇠골로 불리다가 그 후 무수동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연유로는 영해군 묘소 형국이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으로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으로 무수동(無愁洞)이라 했다. 

 

거북등처럼 딱딱한 이야기는 잠시 접고 풋풋한 아이 같은 마음으로 무수골을 느껴보자. 서울에서 하루가 다르게 개발로 인한 도시화에도 꿋꿋하게 옛 모습을 지키면서 남아있는 곳이 흔치 않기에 무수골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사는 선주민이나 이곳을 찾는 시민이 갖는 무수골에 대한 애정은 붕어빵 같은 문양이 될 듯싶다.

 

무수골과 함께 사는 무수천은 도봉산 우이암 동남 사면의 무수골 계곡에서 발원하여 자현암을 거쳐 만세교, 세일교, 제1무수교, 제3무수교, 무수교, 제2무수교, 누원교, 도봉교를 거쳐서 중랑천으로 빠져나간다. 다리를 기점으로 변하는 무수골의 풍경을 번갈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수천의 물길을 따라서 무수골을 구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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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정하고 아담한 암자 자현암, 작지만 마음을 꽉 채워주는 사찰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무수골에서 우이암과 원통암을 제외한 가장 위쪽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자현암이다. 과거에 인근의 초등학교 소풍지로 빠지지 않았던 곳이다. 웅장하지는 않으나 단정하고 아담한 암자이다. 폐사지에 1943년 재건하였다. 자현암에 다다르면 첫눈에 범종각이 눈에 띈다. 의외의 눈 맛이다. 가람배치는 범종각을 앞세우고 요사채, 대웅전, 삼성각이 오밀조밀 아담하고 단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쌍사자석등과 칠층석탑 뒤에 수줍은 듯 들어앉아 있어서 정겹다. 아마도 비구니 사찰이어서일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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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남궁씨의 만세제와 신도비가 있다. 무수골은 전주이씨, 함열남궁씨, 안동김씨 세 문중의 세거지이기도 하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자현암을 등지고 내려와 조금 걷다 보면 무수골에 세거했던 몇몇 문중 중 하나인 함열남궁씨의 만세재가 있다. 만세재 앞에는 한성판윤을 지내던 남궁숙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에 가장 큰 세거 문중을 형성하면서 도봉서원의 복설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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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논의 넉넉한 풍경은 도봉산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펼쳐져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무수골에 있으니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무수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자. 잠시 걷다 보면 커다란 느티나무와 함께 세종의 아홉째 아들 영해군의 묘소와 영해군의 18대손이 전주이씨 문중의 땅을 경작하면서 느티나무가든을 운영하고 있다. 가든 앞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하게 7마지기의 논을 이석현 님께서 짓고 있다. 손자 이주승 군은 “무지개논을 논이 아닌 문화재로 인식하고 서울의 마지막 논을 영원히 무수골에 남기겠다”라는 의지를 갖고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이주승 군은 지금 중학교 1학년이다. 만세교 곁에 ‘무지개논’이라는 이쁜 이름표를 달고 있다.

 

‘꿈틀발전소’ 최기룡 선생님은 이 논을 임대하여 ‘무지개논’이라 칭하면서 학생들의 체험학습 현장으로 매년 모내기와 벼베기체험 행사를 한다.

 

성신여자대학교 생활관 난향원을 지나 세일교를 건너면서 좌측 마중물교회 방향으로 잠시 오르면 윗무수골이다. 이곳에는 우리 기억 속의 맨 처음 동네와 같은 모습으로 10세대가 옹기종기 살아가는 자연부락이다. 마을 주민 김연순 씨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마을을 떠난 적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라고 한다. 주민 대부분이 그러하다. 마을 입구 고개에 순천(舜泉)이라는 샘을 잘 이용하던 중 안동김씨 문중에서 샘을 잘 정비하였다. 그런 후 개울 건너 사시는 분이 순천 샘물을 마시고 돌아가신 후 샘이 말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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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무수골 순천샘과 고개에는 전설과 관습이 남아있어 더욱 옛날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윗무수골에서는 초상이 나면 이 고개로 상여가 넘지 못했다. 지금도 이 고개를 통해 상여가 나가지 못하고, 논으로(마중물교회 쪽) 상여가 나가는 관습이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옛 추억으로 뭉쳐진 윗무수골 주민 10가구는 생활은 매우 불편하지만, 느티나무 평상 아래 오순도순 주민 모두가 하나가 되는 삶이라서 윗무수골을 떠날 생각을 안 하신다.

 

세일교에서 조금 걷다 보면 이내 무수천은 맑은 물놀이터로 변신한다. 이곳은 ‘무수아취’라는 이름으로 도시 생활에 지친 도시인에게 꿈과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몸만 와서 바비큐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숙박은 하지 않는다. 무수아취는 서울에서 가장 큰 600구좌의 텃밭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도시민들이 도시에서 산골을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는 새로운 개념의 캠핑과 바비큐장이다. 무수아취 바로 곁을 흐르는 무수천에서 아직도 자연의 물놀이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서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의 풍경을 놓치면 내일 다시 찾던지, 아니면 평생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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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아취’의 캠핑과 무수천의 맑은 계곡은 자연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의 탐방으로 인한 자연훼손과 화학비료 등의 과다살포로 인한 무수천의 수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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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아취 곁 서울 시민들이 가꾸는 텃밭에는 자연을 닮아보려는 시민들이 도시에서 산골 마을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도봉산의 풍경은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그러나 많은 관광객의 탐방으로 인한 자연훼손과 화학비료 등의 과다살포로 인한 무수천의 수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별히 ‘무수골 마실서당’을 운영하면서 ‘유아숲 스스로 탐험’ 등을 운영하는 김병식 선생님은 “무수골 자체가 계절별 자연환경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었으나, 최근에 무수천이 오염되면서 무수천 상류나 밤나무골에서 놀거나 학습을 한다”라며 “무수골의 급속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가 청소년 교육장의 훼손으로 이어진다”라고 우려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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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다이닝’을 경계로 더는 개발로 무수골 풍경이 훼손되는 일은 없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너럭바위에는 무수골 사람들의 생활사가 바위 위에 점점이 박혀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무수1교를 향하여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서울 시민 중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는 ‘메이다이닝’이 있다. 40년 이상 취미로 전국에서 모아온 나무들로 다양한 코스의 정원을 꾸며놓은 레스토랑에서 식사의 즐거움을 더 할 수 있다. 무수골의 천연자연은 여기까지가 경계인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무수골에 사는 원주민들의 안타까움을 표하는 개발과 보존의 징검다리에서 도시 개발에서 겪어온 과정이 무수골에도 피할 수 없는 아픔으로 녹아있다.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무수골에서 오래도록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조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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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초등학교 앞에 우람하게 들어서는 건축물은 무수골의 풍광을 가로막는 병풍처럼 보인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무수골 도봉초등학교 앞에 서면 학교 뒤로 도봉산이, 왼쪽으로는 북한산이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락산이 조망된다. 풍수에 문외한 사람도 마냥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앞에 공사 중인 건물 2동이 병풍처럼 풍경 앞에 끼어들었다.

 

도봉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퇴직한 최기룡 선생님은 ‘꿈틀발전소’를 통하여 무수골의 환경보호와 생태환경조사 및 보존에 노력하고 자연생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노력은 무수골 정화와 지금뿐 아니라 미래의 무수골을 방문하게 될 우리 후손을 위해 꼭 필요한 지역의 자연보전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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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 아래 비는 마음은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나인가? 나무인가?

나 사는 동안 은행나무는 나무가 아닌 빗방울로 아니, 눈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허공에 자유롭게 매달려있겠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무수골에서 옛 기억은 하나씩 떨구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제는 그동안 허락된 무수골에서 북한산의 모습이 건물에 가로막혀서 산이 사라졌다. 어제는 아름답게 수백 년 제자리를 지키면서 누구에게 한 마디 폐를 끼친바 없는 은행나무가 도끼와 낫과 크레인에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오늘은 끝내 뿌리조차 남김없이 찢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자리를 옮겨 수령을 늘리리라 믿었던 작은 바람은 바람처럼 날아갔다.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체이지만 우리에게 해 끼침 없이 살아온 저들이 우리의 재화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거대한 자연 속 삶의 주인이었고, 오래전 이 땅의 원주인으로의 배타적 권리도 상실한 채 처참한 베임에도 한마디 저항 없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나무처럼 우리 삶도 이러한 이익과 자본으로 재단되고 있지 않은가 싶어서 쓸쓸하였다.

 

“사람이 나무를 핍박하면 나무는 무엇으로 우리에게 그늘을 줄 것인지….”

너무나 사랑하는 무수골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밤새 몸살을 앓다가 반쯤 나를 잃어버린 모습으로 아침을 맞았다. 저 빈터에 얼마나 높게 사람을 위한 집들이 들어설지 그 후에 모습을 알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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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골은 무수천에 발을 담그고 도봉산, 북한산에 안기어서 지금처럼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saeunm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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